드롭메뉴

컨텐츠 시작

오른쪽 시작

참고분류 : 기타

글보기

  • 피해자이자 겁쟁이였던 한 사람의 사고, 감정, 삶 <인간실격> >>2019-03-19 09:16


  •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인간실격> 첫 번째 수기, 14쪽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반(半)자전적인 소설이다.

    부와 권력을 다 지닌 의원 아버지 하에서 여느 모범생 도련님처럼 같이 살아갈 수 있었던 그는, 낮은 신분의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집에서 절연당하고, 술집 여자와 동반 자살을 시도하고, 방탕함으로 점철된 청춘을 보내며 암울과 퇴폐로 인생을 가득 채워나갔다.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듯, 마치 먹이사슬에서 인간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인 것마냥 그는 인간과 인간세상을 무서워했다. 인간이 갖는 폭력성, 비정합성을 바탕으로, 그들의 이해범주 안에 들지 않을 때 내보이는 그 잔인함을 그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공포심, 그것이 그의 본질이었다.


    "너는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을 알아라"


    <인간실격> 세 번째 수기, 83쪽

    저자가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메세지


     아무것도 거절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부탁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는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호의와 애정과 존중받지 않는 법을 배워나감과 동시에 모두에게 광대가 되는 방법을 체득해나간다. 괴로운 일을 당하면 '이렇게 인간의 특질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일부러 넘어지고, 적당히 실수하며 '존경받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정교한 사고나 감정을 전혀 품을 수 없는 존재로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남에게 학대받기 무서워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스스로가 그 역할을 한다.

     그는 깨달은 것이다. 

     서로에게 폭력을 가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러한 개인간의 투쟁은 삶이 끝나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진리를, 너무 어린 나이에 알게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은 주인공을 겁쟁이로 만들어버렸다. 타인에게 오는 고통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고통주는 역할을 남에게 내어주지 않고 자신이 맡아버렸고, 결국 그 삶은 거대한 자기학대가 되었다.



    "저는 옛날부터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인간실격> 세 번째 수기, 101쪽



     주인공이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깨달아버린 진리-인간이 끊임없이 서로 상처입히는 존재- 에는, 또 다른 깨달음 하나가 후속되어야 했다.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명제다.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생명을 갉아먹기 때문에 인간은 잔인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타인을 상처입히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인간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려면 결국 둘 중 하나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인간성을 극복한 초월적 존재)가 되거나, 반대의 의미로 인간으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수밖에 없다. 주인공을 후자가 되었고, 성공적인 자살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생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독자는 그 힘겨운 저항의 관찰자가 된다. 



    "교제는 그저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어서

    그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열심히 익살을 연기하느라 오히려 기진맥진해지곤 했습니다."


    <인간실격>, 세 번째 수기

    

    <겁쟁이가 가득한 세상에 대하여>




    <인간실격>은 피해자이자 겁쟁이였던 한 인간의 사고, 감정, 삶을 깊이있게 보여준다.

     인간은 잔인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마저 낮의 태양이나 밤의 달처럼 당연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까다롭고 복잡하게 작동하며 타인을 필요로 한다. 서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가해지고 반드시 상처입기 때문에,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다만 인간의 불완전성이 낳는 두려움은 타인만을 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향할 때, 비판과 반성, 성찰과 훈련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인간'에서 '타인의 잔혹함으로 발생한 피해자'가 아닌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아프게도 현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듯 (혹은 배우지 못한 듯)하다. 이 진리가 잊혀지면 결국 세상은 피해자와 겁쟁이만 가득해진다.

     피해자와 겁쟁이들은 그 어떤 것도 창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문을 닫고 숨으라', '손을 내미는 자를 의심하라', '속기 전에 속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악랄한 교주(요즘은 종교인보다는 교수, 정치인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녀에게는 부모가 그 역할을 한다)들은 현세에 있지 아니한 것, 즉 완벽한 인품이나 도덕성 혹은 의도나 계획을 말하며 겁쟁이와 피해자들을 이용한다. 겁쟁이와 피해자들은 교주를 따르며 자신은 안전하고 영원히 행복한 낙원에 있다(혹은 있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권리와 시간과 몸을 내어줌으로써 수많은 교주들의 '권위'는 강화된다. 일례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친구를 만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 완벽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궤변 중 궤변이다. 그러나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는지는 최근 유명드라마 시청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 말을 듣고 자라나는 '인간'이 '피해자'가 안됐다면 '겁쟁이'가 되었을 것이다(집안형편이 나쁘지 않아 부모가 적절한 의식주를 제공해주었다면 대부분 '겁쟁이'에서 그친다. 다자이 오사무도 처음에는 그저 겁쟁이였을 뿐, 자본의 가호가 사라지자 끊임없이 피해자가 된다). 만약 겁쟁이가 피해자가 됐다면 대게 가해자를 지목하지 못한다. 단 하나의 가해자를 분별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목할 수 있더라도 체화된 두려움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축적된 분노는 시간이 지나 애꿎은 대상을 향하게 되고,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될 경우, 마녀사냥이나 공개처형으로 이어진다. 이 때, 사람들은 '권선징악', '사필귀정'을 바라기 보다는 자신이 입은 피해가 가져온 모든 고통을 분출할 대상이 필요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일수록, 구조적으로 많은 피해자를 양산해내는 사안일수록 단 한번의 공개처형으로 모든 것이 잠잠해지고는 한다. 즉, '냄비근성'은 그 사회에 겁쟁이와 피해자가 많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 '더 나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교주'가 아닌 그들이 이끄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실격>을 읽으면서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얼마나 많은 겁쟁이들이 익살을 부리며 살아갈까 싶어 더 깊이 몰입했다.

    작가가 표현한 대로, "그저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서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의 두려운 표정이 내 주변인들의 얼굴에서 스쳐지나갈 때면 나는 아마 한 번 더 마음이 내려앉을 것 같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고자 할 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청년독서토론모임 거북이알


heart 관심 글 등록

의견달기

  • 댓글달기
목록으로

Parse error: syntax error, unexpected $end, expecting ')' in /WEB/webuser/html/bookgroup2/group_bbclone/var/last.php on line 2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