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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근현대 건축·공간 탐사기 작성일 2016-10-24
  • 이세영 지음 ㅣ 반비, 201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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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읽기


    서산부인과의원


    풍화의 운명 견뎌온 콘크리트 모성


    “직선은 인간에게 속하고 곡선은 신에게 속한다.” 이 단순 명료한 진술은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의 것이다. 신이 빚어낸 본래의 자연은 변화무쌍한 비유클리드의 세계다. 그러니 ‘두 점을 잇는 최단 거리의 선’ 따위의 수학적 정의는 그 안에서 어떤 물성도 갖지 못한다. 관념 속에나 존재하던 기하학의 추상세계가 견고한 실재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건 생존과 정복을 향한 인간의 집요한 분투 덕분이다. 깎고 세우고 파고 다지는 인고의 노동 끝에 인간이 이룩한 근대도시는 말 그대로 유클리드의 공리 위에 축조된 또 하나의 자연이었다. 중심과 주변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방사형 도로, 중력을 거슬러 융기한 철골 마천루, 기계 문명의 집적물인 대공장과 끊임없이 누군가의 업적을 과시하고 찬양하는 거대 기념비들.

    가우디의 형태주의 건축은 이 같은 유클리드 세계와의 단절 위에 일궈낸 빛나는 예언자의 성취물이었다. 그의 조형 언어는 직각의 좌표 체계에 포획되지 않는 비정형의 곡선을 핵심 원리로 삼았다.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미에 집착했던 19세기 신고전주의와의 절연이자, 막 움트기 시작한 기능주의 건축의 직선 숭배에 대한 결연한 거부였다. 가우디의 선은 자연의 것이었고, 그의 말대로 신의 것이기도 했다.


    평면에 구현된 남근과 자궁의 메타포

    20세기 중반,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극동의 변방 국가에 전후 주류 건축에 반기를 든 당돌한 건축가가 돌출한다. 당대의 거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문하에서 유럽 건축의 첨단 문법을 익히고 돌아온 김중업이었다. 1956년 서울 명보극장과 부산대 본관 설계로 궤도에 오른 귀환자의 이력은 서강대 본관(서울, 1958), 주한프랑스대사관(서울, 1962), 유엔묘지 채플(부산, 1963)을 거쳐 1965년 또 한 차례 가파른 도약을 성취한다. 서울 신당동에 있는 ‘서산부인과의원’이다.


    을지로와 퇴계로가 만나는 삼각형의 대지 위에 4층 콘트리트조로 쌓아올린 이 건물은 완공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일반 상업 건축물과 구분되는 파격의 조형미로 오가는 자의 시선을 낚아챈다. 외부에서 봤을 때 받는 이 건물의 첫인상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이나 군사 요새 같다는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과, 짧고 단단한 타원 기둥을 이어 붙여 빚어낸 육중한 볼륨감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남성성은 그에 못잖은 여성적 조형 요소들에 의해 지체 없이 상쇄되는데, 부드러운 곡면으로 덧댄 두 방향의 발코니와 불규칙하게 배열한 왜소한 사각 창들은 이 구조물에 포스트모던한 갤러리의 느낌마저 불어넣는다. 

    이런 양성적 이미지는 그의 작품 도록에 남아 있는 평면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도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강렬한 성적 메타포다. 건물 서북쪽에 곡면으로 돌출한 램프(경사로)실 때문인데 영락없이 굳게 발기한 남근의 생김새다. 그뿐인가. 램프실 아래 매달리듯 배치한 타원의 격벽은 아무리 봐도 잘 여문 고환의 형상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이 방은 간호사실로 계획됐다.) 그러나 이 공간을 램프실과 떼어놓고 바라보면 또 하나의 상이 겹쳐진다. 이제 막 태동을 시작했음 직한, 웅크린 태아의 모습이다. 이 방 맞은편에 위치한 의사 집무실은 격벽이 음표 꼬리처럼 휘어지며 두 공간 사이에 만들어진 보행 동선에 리듬감을 배가한다.




    수술실과 인큐베이터실, 입원실 등이 자리한 2, 3층에는 크고 작은 타원을 복수의 격실로 분산 배치했다. 김중업론을 쓴 정인하는 이를 “증식하는 원”(『시적 울림의 세계』, 시공문화사, 2003)의 도식이라 명명한다. 별개의 용도를 지닌 원형 공간들이 나란히 자리잡고 통합된 유기체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눈여겨볼 점은 크기와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의 방들이 하나같이 자궁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계산된 도상학적 장치들로 의미의 연쇄 고리를 구축해 건축물의 형태와 쓰임새를 조화시키려는 치밀한 조형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생명현상의 국유화’와 산부인과

    이 건물에서 김중업이 가장 아쉬워한 것은 램프실의 지붕 부분이었다. 입면부가 여성의 산도를 연상시키는 램프실은 애초 1층 전면부에서 지붕까지를 투명 유리로 덮도록 설계돼 있었다. 거친 노출 콘크리트 벽면과의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한편, 천창을 통해 풍부한 자연광을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시공 과정에서 이 구상은 벽에 부딪혔다. 곡률이 서로 다른 창틀을 제작해 천창을 올릴 만큼 당시 국내의 시공 기술이 무르익지 못한 탓이었다. 유리천창은 결국 막바지 단계에 이르러 콘크리트 지붕으로 대체되고 만다.

    이렇게 탄생한 서산부인과의원은 제주대 본관(1964)과 함께 김중업의 형태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20세기 한국 건축의 걸작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이 전위적인 건축물의 남다른 무게는 그 안에 물질화된 건축가의 조형 의지가 협량한 기능인의 순응주의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서산부인과의원은 이상 사회를 향한 예술가적 충동과 사회적 존재로서 건축가의 책무를 방기하지 않으려는 모더니스트의 조형 의지가 비루하고 폭력적인 당대 현실과 대치하며 빚어낸 격투의 흔적이다.

    김중업이 서산부인과의원 설계에 착수한 1960년대 초는 ‘정치 산술’ 성격의 인구 담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국내에서 처음 산아제한에 중점을 둔 ‘가족계획’이 국가 시책으로 도입된 시기였다. 가족계획은 성교와 임신, 출산 같은 개인의 생식 활동에 국가권력을 삼투시키는 통치 테크놀로지라는 점에서, 그것의 국가 시책화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근대 생명관리권력의 특징으로 꼽은 ‘생명 현상의 국유화’가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했다. 목적은 명확했다. 한 사회가 보유한 ‘생식력의 총체’인 인구 규모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통제함으로써 경제적 생산의 능력치를 최대화할 것.

    알려진 대로 군사반란을 통해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경제성장을 지상 과제로 삼고 강력한 발전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전후 베이비붐과 사망률 하락에 따른 급격한 인구 증가는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을 해치는 ‘사회적 역병’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여기엔 미국의 대외 정책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미국 정부는 아시아 후진국들의 인구 증가를 방치한다면 경제 지원을 계속하더라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 뿐 아니라, 인구과잉에 따른 일자리 부족과 생활고가 광범위한 민심 이반을 불러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군부 정권과 미국의 합치된 이해관계는 한국에서 가족계획 사업이 신속하게 확산될 수 있는 강한 동력을 제공했다. 로드맵과 정책 수립, 실행기구 조직에 미국인구협회, 패스파인더재단, 국제가족계획연맹 같은 미국 내 유관 단체들의 긴밀한 자문과 재정 지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한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가족계획 사업을 정부 정책으로 채택한 나라가 됐다.

    당시 한국 정부가 세운 목표는 1962년 2.9퍼센트에 이르는 인구 증가율을 1966년까지 2.5퍼센트, 1971년까지 2퍼센트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민․관․학․의료계를 아우른 범국가적 가족계획 캠페인이 펼쳐졌다. 초창기엔 정부의 보건행정조직이 사업을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기획, 예산 지원과 조정․관리 기능은 보건사회부가, 조사․연구․평가 기능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계몽․홍보․교육 기능은 대한가족계획협회, 시술 사후관리 및 시술요원 훈련 기능은 대한불임시술협회가 맡았다. 정치권도 뒤질세라 1964년 낙태를 합법화하는 ‘국민우생법안’을 발의하기에 이른다.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녹여내다

    하지만 국가적 동원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떠맡은 것은 전문 의료 인력, 그중에서도 산부인과 의사들이었다. 국가 개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선 생식 활동이란 내밀한 행위가 권력의 시선 아래 포착되도록 가시화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선 전문가 집단에 의한 지식의 생산과 축적, 확산이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일상적으로 벌이는 상담, 진료, 시술, 사후관리 활동이었다. 가족계획 10개년 계획 기간(1962~1971)에 산부인과 전문의의 증가폭(2.3배)이 내과(1.67배)와 외과(1.89배)를 크게 앞지른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산부인과’라는 공간은 국가가 임산부(나아가 가임여성)의 개별화된 신체와 인구라는 집합적 신체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는 힘의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서산부인과의원은 김중업이 동시대에 설계한 다른 병원들과도 조형의 모티브와 구현 형태가 뚜렷이 구분된다. 일례로 서산부인과의원에 조금 앞서 지어진 서울 교북동의 행촌의원은 전후 기능주의 양식 건축의 전범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직선으로 처리된 상자형 몸체, 정돈된 입면부, 긴 수평띠 형태의 전면 창은 그의 스승인 르코르뷔지에의 빌라 가르슈Villa Garches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의 특징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하지만 일정한 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병원이란 건물이 가져봄직한 인간미나 체온 따위는 이 건물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건축물의 형태를 치료와 수용이라는 기능에 온전히 종속시키는 도구적 합리성의 실현에 주된 관심을 쏟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 건축된 서산부인과의원에선 일찍이 병원 건축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파격이 실험된다. 이 건조물의 조형 전략을 지배한 것은 용도보다는 형태, 보이는 입면보다는 감춰진 평면, 서사의 직접성보다는 상징의 비옥함이었다.

    이 완강한 형태주의자는 그럼에도 건축물의 주된 이용자가 될 임산부와 영아의 처지에 눈감지 않았다. 김중업에게 산부인과라는 공간은 생식력의 통제와 조절에 동원되는 차가운 기계장치가 아니라,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녹여낸 원형질적 공간, 약동하는 생명을 품어 안을 따뜻한 모성의 공간이어야 했다. 이 같은 조형 의지를 자궁과 태아를 형상화한 타원 격실, 완만하게 물결치는 병실 복도, 부드러운 곡면으로 내부를 감싼 콘크리트 외벽의 견고함 속에 건축가는 풀어냈다.


    건축가는 갔어도 건축물은 남았다

    김중업이 이 건물에 쏟은 애정은 남달랐다. 그의 작품집에는 “둥근 면에 뚫린 구멍들이, 살짝 붙어 돌아가는 발코니들이, 삶에의 희열을 또는 태어나는 새 삶에의 찬가를 부른다. 지붕 부분의 판타지가 개악된 것은 못내 유감이나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열화당, 1984)라는 간결한 후기가 남겨져 있다.

    멸절의 압력과 풍화의 시간을 견뎌낸 서산부인과의원은 지금 초로의 가을을 맞았다. 그사이 소유권은 한 디자인회사로 넘어가 건물 자체가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생전의 김중업은 “참다운 건축가는 시대를 이끌어왔고, 또한 그러한 이들의 작품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 확실한 모습으로 남는다.”(위의 책)고 했다. 그 공언대로, 건축가는 갔어도 건축물은 남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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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저자 · 이세영
    이세영은 연세대 신학과와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2년 《서울신문》에 입사해 사회부, 국제부, 정치부를 거쳤다. 2008년 《한겨레》로 옮긴 뒤에는 문화부 학술담당과 한겨레21부 사회팀장을 지내며 사상, 문학, 건축 등으로 관심 영역을 넓혀왔다. 현재 『한겨레』 정치부 기자로 야당을 출입하고 있다. 노동정치의 위기와 노동계급 2세들의 악마화 메커니즘을 고발한 『차브』를 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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