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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분류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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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병무 시집 작성일 2019-07-12
  • 윤병무 지음 ㅣ 문학과지성사, 2019-06-12
  • 달 이불


    오늘도 달빛 덮고 잠들어요


    오늘은 반달이에요


    달도 반은 자야 하니까요


    저도 반만 잘게요





    -ㄴ지 모르겠어


    어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진 태양계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득한 별이 수명을 다하기 일만 년 전

    이만 광년을 내달려와 우리에게 별빛으로 존재하듯

    우리는 한때 지구라는 행성에서 밤하늘을

    노래할 줄 알았던 직립보행 생물이었는지 모르겠어

    공간이 시간을 떠날 수 없듯

    시간이 공간을 지을 수 없어서 우리는

    당시 생생했던 날들을 재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때 그곳에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바다가 있었고

    그럴 거면 아예 끝장내라고 목 놓다가

    이젠 운명을 치워달라며 무릎 꿇었다가

    모래톱에 쓴 이름 삼킨 파도를 응망하다가

    혼잣말 발자국만 남기고 떠났던 겨울 바다

    길고 혹독한 빙결만 차곡차곡 쌓여

    끝내 세상이 얼어붙었던 대사건이 있기 전의 현장을

    우리는 당장인 줄 알고 살아내는지 모르겠어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불행이 걸어간 시절에

    슬픈 옛사람이 꾸었던 악몽의 등장인물인지 모르겠어

    질려 소리친 가위를 흔들어 깨운 손에 이끌려

    불쑥 무대 뒤로 퇴장한 건지 모르겠어

    여명에만 꺼지는 무대 조명 ― 서녘 달빛이,

    무릎으로 세운 홑이불 산맥에 그림자 드리워

    흉몽의 능선을 조감도로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하얀 히말라야에 파묻은 얼굴인지 모르겠어


    웬 목맨 귀신이 떠났던 대들보 찾아오는 소리냐며

    후려치는 바람에 얼얼한 뺨이 벌게져도

    손자국은 백 년 후 겨울날 홍시인지 모르겠어

    앙상한 당신의 이름을 머리에 이고

    겨울이 닳도록 탑돌이 하는지 모르겠어

    당신과 나의 시간이 엇갈려 지나가도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정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의 이름에 집 지은 지 오래

    빗장 건 대문에 얼비친 얼굴이

    바로 당신이자 나인지 모르겠어

    잡풀 웃자란 마당이 무심한 자손의 묘소인지 모르겠어

    행인이 서성이던 자리의 족음이 당신인지 모르겠어

    새끼 기린을 뒤따른 바람이 나인지 모르겠어

    당신인 줄 알고 밤길에 잘못 부른 이름인지 모르겠어


    당신을 고인 물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여름을 보았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달이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그믐을 울었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사자라 명명한 이는 당신의 포효를 들었는지 모르겠어

    나를 구렁이라 명명한 이는 나의 허물을 주웠는지 모르겠어

    시간의 개울을 건너본 이들은 우리를 살아보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버릴 시간의 돌다리에서

    굽이치는 물결을 만진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살음을 生人이라 하지 않고 人生이라 하는지 모르겠어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저자소개

    저자 · 윤병무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했다. 1995년 가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5분의 추억』 『고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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