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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분류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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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정희 시집 작성일 2019-12-02
  • 고정희 지음 ㅣ 문학과지성사, 2019-11-15
  • 서울 사랑

    ― 어둠을 위하여



    빨래터에서도 씻기지 않은

    고씨 족보의 어둠을 펴놓고

    그 위에 내 긴 어둠도 쓰러뜨려

    네 가슴의 죄 부추긴 다음에야

    우리는 따스히 손을 잡는다

    검은 너와 검은 내가 손잡은 다음에야

    우리가 결속된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쓰러지는 법을 배우며

    흰 것을 흰 채로 버려두고 싶구나

    너와 나 검은 대로 언덕에 서니

    멀리서 빛나는 등불이 보이고

    멀리서 잠든 마을들 아름다워라

    우리 때 묻은 마음 나란히 포개니

    머나먼 등불 어둠 주위로

    내 오랜 갈망 나비 되어 날아가누나

    네 슬픈 자유 불새 되어 날아가누나


    오 친구여

    오랫동안 어둠으로 무거운 친구여

    내가 오늘 내 어둠 속으로

    순순히 돌아와 보니

    우리들 어둠은 사랑이 되는구나

    우리들 어둠은 구원이 되는구나

    공평하여라 어둠의 진리

    이 어둠 속에서는

    흰 것도 검은 것도 없어라

    덕망이나 위선이나 증오는 더욱 없어라

    이발을 깨끗이 할 필요도 없어라

    연미복과 파티도 필요 없어라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손을 맞잡는 일

    손을 맞잡고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안는 일

    부둥켜안고 체온을 느끼는 일

    체온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일이거니


    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별이여

    내 여윈 팔등에 내려앉는 빛이여

    너로구나 모른 체할 수 없는

    아버지 눈물 같은 너로구나

    아버지 핏줄 같은 돈으로

    도시에서 대학을 나오고

    삼십 평생 시(時) 줄이나 끄적이다가

    대도시의 강물에 몸 담그는 밤에야

    조용히 조용히 내려앉는 빛이여

    정작은 막강한 실패의 두 손으로

    한 웅큼의 먹물에 닫쳐든 흐―이―망

    여전히 죽지 않는 너로구나


    이제야 알겠네

    먹물일수록 찬란한 빛의 임재, 그러니

    빛이 된 사람들아

    그대가 빛으로 남는 길은

    그대보다 큰 어둠의 땅으로

    내려오고 내려오고 내려오는 일

    어둠의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서울 사랑

    ― 절망에 대하여



    황혼 무렵이었지

    네 외로움만큼이나 흰

    망초꽃 한 아름을 꺾어 들고 와

    하느님을 가진 내 희망이

    이물질처럼 징그럽다고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쓸쓸히 쓸쓸히 웃었지

    조용한 밤이면

    물먹은 솜으로 나를 적시는

    내 오장육부 속의 어둠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라서

    한기 드는 사람처럼 나는 웃었지

    영등포나 서대문이나 전라도

    컴컴한 한반도 구석진 창틀마다

    축축하게 젖어 펄럭이는 내

    하느님의 눈물과 탄식을

    세 치 혀로 그려낼 수는 없는 것이라서

    그냥 담담하게 전등을 켰지

    전등불 아래 마주 선 너와 나

    삼십대의 불안과 외로움 너머로

    유산 없는 한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

    그러나 친구여, 나는 오늘 밤

    오만한 절망으로 똘똘 뭉쳐진

    한 사내의 술잔 앞에서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를

    다시 쓸쓸하게 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 음미하면서, 오직

    내 희망의 여린 부분과

    네 절망의 질긴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닿기를 바랐다

    아프리카나 베이루트나 방글라데시

    우울한 이 세계 후미진 나라마다

    풍족한 고통으로 덮이시는 내

    하느님의 언약과 부르심을

    우리들 한평생으로 잴 수는 없는 것이라서, 다만

    이 나라의 어둡고 서러운 뿌리와

    저 나라의 깊고 광활한 소망이

    한 몸의 혈관으로 통하기를 바랐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저자소개

    저자 · 고정희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여성해방출사표』 『아름다운 사람 하나』, 시선집 『뱀사골에서 쓴 편지』,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1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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