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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분류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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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작성일 2020-08-02
  • 안희연 지음 ㅣ 창비, 2020-07-24
  • 불이 있었다



    그는 날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나를 도닥이다 잠드는


    불은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길 즐긴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저자소개

    저자 ·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이 있다.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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