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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분류 : 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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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천 년의 학교 작성일 2019-10-08
  • 한동일 지음 ㅣ 문학동네, 2019-10-08
  • Lectio Ⅰ. 인간


    당신은 자유인입니까

    노예입니까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인간』에서 주인공 사만타와 라울은 ‘인간homo’에 대해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인간은 참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사랑의 행위를 하지만 그건 번식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감정이 없으니까요.”


    “그래요. 하지만 인간은 그 위대한 사랑의 이름으로 더 나쁜 범죄를 저지르죠. 예를 들어 인간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내세우며 가장 참혹한 전쟁들을 벌였습니다.”


    “예수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지요.”


    “그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지요. 그리고 훗날에는 그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이 행해졌습니다.”


    “인간은 열정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열정 때문에 광기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죠.”


    “인간은……(사만타는 또다른 논거들을 찾는다.)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이간은 자신의 절망적인 조건을 견뎌내기 위해 유머를 발명할 필요를 느낀 유일한 동물이죠.”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교차하며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언뜻 보면 두 사람의 생각이 모두 타당해 보입니다. 긍정적인 관점의 안경을 쓰고 보느냐 부정적인 관점의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지요. 인간의 선함에 초점을 맞추면 개인은 아름답고 인간의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평가할 것이며, 인간의 악행과 파멸로 점철된 역사를 살피면 인간은 역시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했을까요?


    사실 ‘인간’은 고전법의 핵심개념입니다. 전기 고전기의 법학에선 인간을 ‘영혼이 깃든 몸’으로 파악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권리와 능력은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 영혼이 들어가는 첫 ‘호흡spiritus’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지요. 또한 생애 최초의 소통행위라 할 수 있는 아기의 첫 울음소리는 인류의 새 구성원임을 신고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로마인들이 출산 직후에 산파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아 집안의 가장이 들어올리는 상징적인 행위를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를 ‘톨레레 리베룸tollere liberum’이라 불렀는데요. ‘자녀를 들어올림’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인들은 자녀를 세상에 ‘낳는다’고 보지 않고, 이 세상에 ‘자녀를 들어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라이온 킹〉을 보면 주술사 원숭이인 라피키가 정글의 모든 동물들 앞에서 아기 사자 심바를 들어올려 보이는 장면이 있지요. 바로 이 장면이 로마인들이 출산 직후의 아기를 들어올리던 행위를 묘사한 것이랍니다.


    혹시 인간의 인격과 개별성을 의미하는 ‘페르소나persona’가 그리스어에서 파생한 라틴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원래 이 단어는 극장에서 목소리를 크게 해주는 확성기 기능이 있는 배우용 ‘가면’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단 한 번 공연되는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배우인 인간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는 ‘외적 인격’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하는데요. 인간에게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목소리, 시선, 표정 등을 통해 소통하는 사람의 특성을 규정하지요. 한편 법률용어 ‘페르소나’는 ‘사람은 누구나 얼굴이 있다’는 평등의 가치와 ‘모든 얼굴은 서로 다르다’는 개별성의 가치를 결합하고자 하는 인류의 염원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얼굴vultus’의 철학을 더욱 심화시킨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입니다. 레비나스는 “얼굴들은 서로가 다른 이들로 향한다. (…)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존재하는 인간들의 실재적인 현존과 이러한 상호적인 관계들에 있는 작은 사회다”라고 말했습니다. 얼굴들이 서로 인격적으로 마주보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며 유토피아라는 것입니다.


    얼굴들끼리 마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공동체에는 이상적이지만, 과연 개인에게도 마냥 좋은 일일까요? 어쩌면 인간은 자기 얼굴보다 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에 힘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이 나와 많이 다르다고 느낍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내게는 없는 아름다움과 이상함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발현되면 사랑이 되지만, 부정적으로 발현하면 질투와 미움이 생깁니다. 비교하고 깎아내리고 증오하고 격리시키지요. 타인의 얼굴을 향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면 차별과 폭력이 되고, 나의 얼굴을 향해 이런 잣대를 휘두르면 자아를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타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거울 속의 내 얼굴뿐만 아니라 더 깊숙한 내면까지 정직하게 응시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지는 않을지라도 스스로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처럼 ‘페르소나’는 오랫동안 인생을 해석하고 사유하는 예술과 철학의 주요한 화두였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단어가 로마법에서 엄연한 법률용어의 하나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로마법은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존재이고 서로 다름을 인정했으리라 짐작하겠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로마법은 “모든 인간은 자유인이거나 노예다Omnes homines aut liberi sunt aut servi”라고 단호하게 규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예제는 마치 죽음과 같다Serivitutem mortalitati fere comparamus(D. 50. 17. 209)고 비유했지요. “노예제는 만민법상의 제도로서 어떤 자가 타인의 소유권에 속하는 것으로 자연의 섭리에 반한다.Servitus est constitutio iuris gentium, qua quis dominio alieno contra naturam subicitur(D. 1. 5. 4. 1)고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타인의 소유권에 속하며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삶을 사는 인간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로마법은 인간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뻔뻔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법과 현실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인간의 현실이 법조항을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법이 현실을 더 공고하게 뒷받침하는 것일까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아득한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단순하고 가혹한 이분법이지만 로마인에게 “당신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Servus es an liber?”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신원조회 사항이었습니다. 일상에서 “당신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라는 질문은 다양한 형태의 의문문으로 던져졌습니다.


    “우트룸 세르부스 에스 안 리베르?Utrum servus es an liber?

    “세르부스네 에스 안 리베르?Servusne es an liber?


    또는 “당신은 자유인이었습니까?Fustin/Fustine liber?”라고 과거형으로 묻기도 했지요.


    물론 이 자유인과 노예의 이분법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페니키아 출신의 법학자 울피아누스는 “시민법에서 노예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자연법에선 그렇지 않다. 자연법에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연법이란 모든 시대와 장소에 적용되는 변치 않는 규범으로 현재 시행되고 있거나 과거에 현실적으로 시행됐던 실정법의 우위 개념입니다. 하지만 로마법은 엄연히 자연법이 아니라 실정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원칙과 이상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피부에 더 와닿는 것은 현실의 규약들이지요. 로마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적용된 법률은 ‘평등의 자연법’이 아닌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까지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실정법이었습니다. 결국 대전제로는 인간이 평등한 존재라고는 하나, 현실적으로 평등과 다름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은 오직 ‘자유인’에 국한돼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노예는 열등한 존재였습니다. 인격이기 전에 소유할 수 있는 재산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법률상 매매와 증여, 상속과 유증遺贈의 대상이었습니다. 노예를 소유한 주인은 자기가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다고 느꼈고, 노예는 자기 자신의 열등함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나아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로마사회는 노예는 우연히, 운이 나빠서, 후천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그렇게 태어난다고 설명하는데, 이 우열의 논리는 거의 모든 역사를 관통하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자유인과 노예의 실상을 알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끼리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어서 화가 치미나요?


    그러나 저는 어떤 면에서는 로마시대와 오늘날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노골적인 신분제만 없다 뿐이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조건과 양상은 어떤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물론 오늘날에는 ‘자유인인가? 노예인가?’라고 대놓고 묻거나 신원을 조회하는 일은 거의 없지요. 하지만 지금도 우리 사회는 소속과 경제력에 대한 교묘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을 가르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당신은 전임교수인가? 시간강사인가?”

    “당신은 서울캠퍼스 학생인가? 지방캠퍼스 학생인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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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저자 · 한동일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 로타 로마나가 설립된 이래 700년 역사상 930번째로 선서한 변호인이다.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에서 2003년 교회법학 석사학위를 최우등으로 수료했으며, 2004년 동대학원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로마를 오가며 이탈리아 법무법인에서 일했고 서강대에서 라틴어 강의를 맡아 진행했다. 그의 라틴어 강의는 입소문을 타고 다른 학교 학생과 교수, 일반 수강생들까지 청강하러 찾아오는 등, 서강대 최고의 명강의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되려면 유럽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법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 외 여러 유럽어를 구사해야 하며, 라틴어로 진행되는 사법연수원 3년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이들 중에서도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비율은 5~6퍼센트에 불과하다. 현재 연세대 법무대학원 및 법학대학원에서 ‘유럽법의 기원’ ‘로마법 수업’을 강의하고 있으며, 번역 및 집필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카르페 라틴어(종합편)』 『라틴어 수업』 『교회의 재산법』 등이 있다. 『라틴어 수업』은 2017년 수많은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그 외 옮긴 책으로는 『동방 가톨릭교회』 『교부들의 성경 주해 로마서』 『교회법률 용어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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