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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랙리스트 실체와 저항의 문화적 의미 2 작성일 2017-03-28


  • 5. 광화문 캠핑촌 예술행동: 블랙리스트 저항의 문화적 의미 


    박근혜 정부가 지행한 블랙리스트 사태로 인해 예술인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블랙리스트 반대, 책임자 처벌을 위한 시국선언을 마치고 곧바로 텐트를 치고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이 정권이 작성한 블랙리스트 문건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시작한 블랙리스트 사태는 예술인들의 저항을 결집시켰다. “우리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라는 집단적 커밍아웃은 역설적이게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역으로 블랙리스트 명단에 실수로 포함되지 않은 예술가들에게 매우 심리적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러나 매우 역설적이게도 블랙리스트라는 전제군주적 억압은 예술가들을 광장의 최전선에 서게 만들었다. 


    2016년 11월 4일,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이 노숙농성을 시작하면서 광화문 광장은 시위의 공간을 넘어서 점거의 공간이 되었다. 예술인 노숙농성이 촛불시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광장 정치의 직접성과 급진성이다. 예술인들이 광장에서 24시간 점거함으로써 광장은 매우 많은 실험과 실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예술인들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광장에 참여한 시민들의 참여와 광장의 공유문화적 가치들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캠핑촌에는 예술가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성직자들, 일반 시민들이 함께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캠핑촌 촌민들은 매일 낮과 밤 다양한 예술인들이 참여하는 문화제를 연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화가, 국악인, 클래식 연주자, 영화인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광화문 캠핑촌은 매일 예술난장이 벌어지는 곳이다. 낮에는 ‘새마음애국퉤근혜자율청소년봉사단’을 만들어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며 청와대로 간다. 청와대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제보를 받고 청소하러 간다고 한다. 청소하러 가면 경찰들이 따라붙는다. 청와대 주변에 이르면 예외 없이 길을 가로막는다. 화가 나지만, 그들은 룰루랄라 매일 빗자루 들고 청소하며 청와대로 향한다. 지난 2017년 1월 11일에는 블랙리스트 예술인들 250명이 세종시 정부종합청사로 달려가 조윤선 문체부 장관의 퇴진과 문화행정 파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박2일 투쟁이 진행되었고, 2월 10일에는 박근혜 즉각 탄핵과 재벌해체 및 재벌 총수 구속을 요구하며, 강남-여의도-광화문을 행진하는 1박 2일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207년 1월 16일에는 블랙리스트에 속한 예술가들이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 벌여 461명의 예술가들이 손해배상 소송에 참여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술인들이 직접민주주의의 최전선에 나선 것이다. 


    예술인 캠핑촌은 매주 ‘광장신문’을 발행한다. 토요일판으로 나오는 첫 번째 광장신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 발표를 호외로 실었다. 물론 가상 기사이지만 잠시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대변했다. 두 번째 신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전격 구속, 이재용 구속영장 청구 결정을 특종으로 삼았고 세 번째 신문은 탄핵 이후의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미래를 이야기 했다. 이 역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회복을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대변했다. 예술인 캠핑촌에서는 매주 토요일 밤, 촛불집회가 공식 마무리되는 시간에 ‘하야하롹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2016년 11월 17일-19일까지 3일간 15개 팀이 참여하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고, 11월 26일에는 전국 9개 도시에서 50여 개 팀이 동시다발로 참여하는 ‘하야하롹 공연’이 열렸다. 크래시, 말로, 폰부스, 안녕바다, 노선택과 소울소스가 참여한 토요일 밤 광화문 공연은 메탈, 록, 재즈, 레게 사운드가 한 장소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낸,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2017년 2월 11일부터는 박근혜의 즉각 탄핵을 외치는 뮤지션들의 3주간 공연이 이어졌다. 예술인 캠핑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매주 광장토론회를 열어 광장의 의미, 광장의 저항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광장에서 혁명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아카데미도 개최했다. 예술인들이 힘을 모아 문체부의 문화행정 파탄을 풍자삼아, 우리만의 “궁핍현대미술광장”을 만들었고, 예술 검열에 저항하는 연극인들이 중심이 되어 “블랙텐트”를 만들어 연극과 춤과 영화와 공연을 올리기 시작했다. 


    광화문 예술인 캠핑촌은 어느새 예술의 공유지가 되었다. 광화문 캠핑촌에는 초라한 텐트이지만 예술인 레지던스가 있고, 수많은 뮤지션들이 참여한 “하야아롹” 무대가 있고, 촛불 시민의 열정과 분노를 담은 “궁핍현대미술광장”이 있고, 연극인들과 그 동료 예술인들이 만든 블랙텐트가 있다. 촛불시민들이 가장 많이 사진을 찍는 조형물인 ‘촛불탑’이 있으며, 광화문 광장에서 명물이 된 최병수 작가의 블랙리스트 면도날 조형물도 만날 수 있다. 박근혜-이재용-김기춘-조윤선 등 촛불 5적 피규어도 있다. 매일 많은 예술인들이 공연을 하고, 광장의 곳곳에는 커뮤니티 아트가 넘실댄다. 광화문 캠핑촌은 예술인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예술인 광화문 캠핑촌 노숙농성은 3월 4일자로 넉 달째를 맞는다. 광화문 캠핑촌 예술행동은 아마도 예술인들이 정치적 시국 사건에 참여한 최장기간 거리농성으로 한국 문화운동사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 되었다. 문화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1980년대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거리와 현장에서 정권의 권력에 맞서 싸운 적은 없었다. 광화문 캠핑촌은 예술행동의 역사적 사건, 예술적 커먼스 운동의 사건으로 기록될만하다. 그들은 과연 광장에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6. 예술의 자율적 활동과 연합을 위한 매니페스토 


    캠핑촌 노숙농성 예술인들은 박근혜 퇴진만을 원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없는 세상, 세월호 희생자들의 진상이 규명되는 그날을 위해 그들은 광화문광장의 최전선에 있다. 광화문 캠핑총 예술인들, 블랙리스트 예술인들은 정권교체가 희망이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충분조건이다. 그들은 정권교체가 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제대로 된 문화정책, 문화행정, 예술가들의 자유와 주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받는 세상을 원한다. 문화 관료와 정치인들이 문화의 주인이 아니라 시민과 예술가가 문화의 주인이자 주체가 되길 원한다. 총 누계집계로 1000만 명을 훌쩍 넘긴 전국의 촛불집회와 그 참여자들의 행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문화에서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와 그 자유를 보장하는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인행동위원회’의 광장토론회에서 발표한 천정환 교수의 아래의 발제문(「촛불 시민항쟁의 문화정치 : 다중적 주체성과 비폭력ㆍ합법주의」)은 이번 촛불항쟁에서 문화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항쟁은 문화를 거쳐 촉발ㆍ전파된다. 미디어 기술과 도덕 감정이 항쟁의 교향곡을 합주한다. 대의ㆍ상징ㆍ언어ㆍ프레임ㆍ감정ㆍ이념ㆍ서사가 각종 미디어를 통해 행동을 촉발한다. 2008년 촛불부터 인터넷과 디지털미디어는 가장 중요한 조직자(네트워커)가 되었다. 또한 그 속성은 운동의 조직 방식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SNS에서의 조직과 확산이 이번 항쟁의 큰 특징이다. 참가자들은 실시간으로 시위 참가에 대한 ‘소셜한 공감’을 끌어냈고, 거대 미디어가 잡아낼 수 없는 집회ㆍ시위의 세부를 중계했다. 광화문 인근에 결집한 미디어와 채널의 수는 참가자×N=(거의) 무한대였다. 이는 지배의 ‘송출량’을 압도해버렸다. 이는 언제나 버벅거려온 박근혜의 ‘베이비토크’를 풍자와 시국성명의 언어가 양과 질에서 압도한 현상과 비교될 수 있다. 2) 시위나 저항행동 자체만이 아니라 연설ㆍ토론회, 문학ㆍ음악ㆍ미술ㆍ공연 등 복합ㆍ종합적인 문화예술의 작용으로 광장 민주주의의 ‘현장’과 그 안에서 주체성이 구성된다. 투쟁의 문화화ㆍ축제화는 2000년대 이후 증대돼왔으며 이번 촛불항쟁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주류 언론은 ‘문화화’를 곧 촛불의 ‘비폭력ㆍ평화’와 등가로 놓고 촛불의 진행과정을 규정하거나 통제하려 했다. 지배의 프레임에 갇힌 ‘비폭력ㆍ평화’를 비판하면서 ‘문화화’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광장의 문화는 단순한 수단이나 투쟁의 어떤 부산물ㆍ결과물이 아니다. 3) 운동ㆍ봉기ㆍ항쟁은 새로운 문화적 주체와 산물을 만들어내어 빠르고 큰 문화적 변화를 야기하고 가속화한다. 혁명의 문화는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동시에 ‘당연히’ 평등주의적이다. 그러나 아직 초기적이며 혁명의 급진화ㆍ내재화(습속과 사회세계 속에 스미게 하는 것)하지 않은 단계에 있는 2016년 촛불의 문화적 효과가 무엇일지 짐작하기 어렵다.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이 그랬듯, 촛불이 어떤 사회개혁의 요구와 접속하여 불길이 될지, 아직은 미지수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 한다.


    천정환의 언급은 문화가 촛불항쟁의 플랫폼이고, 투쟁의 현장화, 축제화를 만들었고, 그런 점에서 문화가 항쟁의 수단이나 부산물으로 보아서는 안 되지만, 그러한 개방적인 문화항쟁이 앞으로 어떤 사회개혁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 눈여겨 볼 대목이라고 말한다. 예술검열,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며 예술인 시국선언과 광화문 예술인 캠핑촌을 차린 예술가들은 블랙리스트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하며 이번 촛불항쟁을 통해 시민들과 예술인들의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민혁명을 위한 공화국의 문화정체성을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 


    작금의 블랙리스트 사태에 예술인들이 분노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가-통치자-권력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예술의 비판적 표현 행위를 정치적으로 의심하거나, 정치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음모술로 보려거나 통치자의 심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예술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을 지원금이라는 기준으로 배제시키거나 포함시키려 하고, 그것을 당연시한다. 블랙리스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박근혜-김기춘-조윤선은 영화 <변호인>이나 <광해>가 좌편향 되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을 좌편향적으로 보려는 시각 자체가 매우 편향적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준으로 좌편향적인 예술을 임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고, 그 해석과 판단이 매우 편향적이며 정치적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 블랙리스트 그 자체이다. 


    마지막 말, 즉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 블랙리스트 그 자체이다”라는 말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먼저 정당성을 얻어야 한다. 첫째 예술가들이 완전하게 자율적이어야 한다. 두 번째 예술가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라는 점이다. 


    예술가들의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은 정치적으로 어떤 의견과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한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예술가들과 그 작품은 정치적 관점을 견지한다. 예술의 정치성은 창작물이 정치적인 것에 관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술의 정치성은 그것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한 정치적인 해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술과 예술가들이 완전히 자율적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제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특정한 예술적 표현과 예술가들만을 정치적으로 보려는 ‘정치적’ 행위가 생겨난다.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이 분노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자신이 정치적인 이유로 지원에서 배제되어 돈을 받지 못해서였을까? 물론 그런 생각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이유는 자신과 자신의 예술적 행위를 돈으로 환원하려는 권력의 생각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박근혜 정부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어떤 진영이 대권을 잡더라도 예술과 예술가를 대하는 태도의 가이드라인을 “예산 지원”으로 설정한다면 그 태도는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문화정책의 관점에서는 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하고, 예술인들의 지원을 담당하는 문체부 산하기관에 대한 자율적인 지원 체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가령 예술인들의 창작 지원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기관장 선임과 운영을 예술인들의 자발적인 의사와 요구에 의해서 결정해야 하고, 위로부터 군림하는 관료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기관운영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선언이 필요하다. 또한 예술인들의 생활환경을 지원하는 예술인복지재단이나 예술인들의 예술교육을 지원해주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운영 역시 예술인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지원의 틀’로 가두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 영역과 폭을 넓혀줄 수 있는 개방적인 관점이 견지되어야 한다. 예술인들의 자율적인 창작활동의 폭을 넓히기 위해 예술인들의 예술인 스스로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는 예술인 창작의 자율공간들이 많이 확보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술인들의 창작과 생활의 자율적 활동을 위해 아래와 같은 대안들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블랙리스트 사태를 넘어서 예술인들의 자율적인 활동과 연합을 위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1)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규명과 예술 검열 시행 부역자를 기록하는 보고서 작성, 2) 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 완전 보장을 위한 선언, 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등 산하기관 운영의 독립과 예술인 자치권 보장, 4) 예술인 창작환경과 활동의 자율적 보장을 위한 예술인복지재단,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지역문화재단의 지원 및 운영개혁, 5) 예술인들의 자치 문화공간(아티스트 “크리에이티브 커먼스”)의 보장과 확대를 위한 예술행동과 문화정책의 비판적이고 생산적인 개입활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7. 직접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예술-시민행동’의 연대


    2008년과 2017년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아주 다양한 시민주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 주체들의 직접적인 행동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자들의 희망을 대변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직접행동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나 “대중이 거리로 나와 스스로 외치고 발언하는 행동은 직접민주주의의 계기일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로 직접 민주주의가 될 수는 없다”(백승욱, 2009:44-5)는 지적대로 대중들의 직접 행동의 경험들이 곧바로 직접 민주주의의 정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1848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직접 투쟁이 대의제 공화국으로의 귀결을 목도한 바 있다. 


    탄핵 이후 제도 정치권이 할 수 있는 일은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각 정당과 정파들이 차기 대권구도를 짜는 것이다. 헌재의 판결도 국민의 승리, 정치의 정의를 수호하는 목적이라기보다는 대권을 잡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하는 데 그칠지 모르겠다. 정치권은 국회의 압도적 탄핵 가결이 모두 국민들의 엄중한 뜻을 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근혜 탄핵이라는 정치적 과정에서만 한정된 말이다. 오히려 정치권의 이후의 움직임들은 촛불의 민심을 집권이라는 최종 텍스트의 레퍼런스 정도로 삼으려는 태도로 돌변할 것이다. 탄핵 이후, 특히 대선 국면에서는 아마도 정치가 민심을 수렴하기보다는, 정치가 민심을 당파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프랑스 1848 혁명의 반동의 결과로, 통치 권력의 왜곡된 현실을 언급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이렇게 헌법은 대통령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부여해주었다면, 의회에서는 도덕적 권력을 확보해 주었다. 대통령 선출행위는 주권적 인민이 4년마다 한번 씩 하는 트럼프 놀이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회는 국민과 형이상학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통령은 국민과 개인적 관계를 지닌다. 사실 의회는 개별적 대표자들을 통해 국민정신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지만 대통령 안에서는 국민정신 그 자체의 현신을 발견한다. 의회와 달리, 대통령은 일종의 신권을 보유한다. 한마디로 그는 인민의 은총을 받은 대통령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이 1848년의 헌법이었다. 이 헌법은 1851년 12월 2일, 머리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모자가 단지 한번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붕괴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자는 다름 아닌 나폴레옹의 삼각 모자였다. 곧 헌법은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인민에게 겨누어진 총검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총검에 의해서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존경할만한 공화파들”의 선조들은 그들의 상징인 삼색기를 유럽 전체에 전파했다. 그들은 차례로 또 하나의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저절로 전 유럽대륙을 여행했으며, 한층 새로워진 예정을 가지고 프랑스에 돌아와서는 프랑스 행정구역의 절반 이상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게엄령이었다(칼 마르크스, 2012)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1848년 프랑스 노동자 계급 혁명에 의해 정초된 헌법이 대통령의 일방적 권한에 의해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잘 포착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혁명을 통해 그토록 원했던 것이 만인의 투표권이었지만, 인민의 투표로 결정된 의회는 인민을 대변하지 못하고, 인민의 은총을 받은 대통령이 행사했던 권한은 오로지 헌법 파괴, 의회 해산이었다. 인민 위에 군림하는 의회, 의회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 이것이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며 원했던 민주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민을 기만한 부르주아 공화파의 기만적인 처세와 인민이 호명한 루이보나파르트의 기만과 독재술의 관계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헌법을 단숨에 무력화시킨 나폴레옹의 독재 술을 예리하게 분석한 마르크스의 이 책에서 우리는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제도 정치, 의회정치의 어두운 거울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로 시작된 시민혁명, 혹은 명예혁명의 결과가 고작 전제군주 나폴레옹1세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등극과 같은 비극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유신체제를 형식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는 정권교체, 죽 쒀서 개에게 주는 정치적 반동을 제어하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시민들은 원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표상과 대의제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정치를 위해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세월호 재난은 한국 사회의 근대적 발전주의의 모든 모순이 응축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진상규명은 민주주의의 정치를 바로 세우는 데 있어 결정적이다. 세월호 재난과 그 재난을 더 끔찍하게 만든 통치의 재난 안에는 유신 체제의 유령의 모든 사이비 주술이 압축되어 있다. 이는 재난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자 국가와 권력의 존재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재난의 진상규명을 통해 안전 사회와 생명 존중의 사회의 가치를 중시하고, 국가의 통치적 장치들의 전복을 요청함으로써 대의 정치와 전제군주적 정치의 한계를 넘어 21세기 생태적 문화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살 수 있는 법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체제의 구성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벌의 해체, 친일파 청산, 기득권의 박탈에 대한 분명한 정치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법적, 제도적 강제에 의한 재벌의 지배구조를 해체하고, 하청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권의 복원과 학벌과 인맥 지연이 적폐를 위한 사회개조 프로그램이 시작되어야 한다. “박근혜 정치의 청산과 새로운 사회의 구성을 위한 맹아가 만들어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효율성 추구가 기업과 정권의 카르텔을 형성하게 만들었고 시민들의 삶을 위기에 빠뜨렸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적 가치 형성이 중요하다. 세월호참사로부터 확인된 생명무시, 청년들에게 헬조선을 선사한 경쟁과 위계, 그리고 모든 것을 개인책임으로 돌리는 각자도생 논리를 뛰어넘어, 생명과 개인에 대한 존중, 기업과 권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책임, 그리고 공동체성 확보라는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김혜진, 2016:16)


    셋째, 시민정부의 수립이다. 국가 권력의 제도적 정당정치에 한국 사회의 미래를 맡기지 말고, 직접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정치의 장을 확대할 수 있는 ‘정당-시민’ 정치의 연합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이처럼 시민이 광화문만이 아니라 각 마을, 공장, 학교에 공정하고 공평한 공공영역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론을 모으고 시민 각자가 주체가 되는 시민위원회를 구성하자. 그동안 수탈당하고 억압당한 이들이 적(노동)·녹(환경)·보(여성 및 소수자) 동맹을 맺어 지배동맹체에 맞서는 시스템을 정치의 장, 경제의 장, 사회문화의 장에 건설한다. 이를 더 큰 단위로 확대하며 시민의회와 시민정부를 구성한다. ‘몫 없는 자의 민주제’를 실시하여, 각 위원회의 위원들이나 의원들의 일정 부분은 선출하지 않고 추첨으로 한다.”(이도흠, 2016:13) 주장은 시민 정부 수립의 단초를 제공해준다. 


    마지막으로 청년세대를 위한 대안사회의 실질적인 내용들에 대한 대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헬조선을 극복하는 사회, 여성혐오의 자명성을 넘어서는 사회, 학력과 배경의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공유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 촛불의 민주주의 정치는 여전히 급진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저자소개

    이동연
    문화연대 집행위원장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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